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 배경과 원인
1. 정치적 요인 : 황제 숭배와 국가 통합
로마 제국은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체계를 통해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고, 이는 로마 당국에게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되었죠. 특히 기독교인들의 황제 숭배 거부는 로마의 정치적 안정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습니다.
2. 종교적 요인 : 유일신 신앙과 다신교 사회의 충돌
로마 사회는 다양한 신들을 숭배하는 다신교 사회였으며, 종교적 관용을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으며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로마인들에게 무신론자로서 비춰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태도는 로마 사회의 종교적 전통과 충돌하였고, 박해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3. 사회적 요인 : 사회 질서에 대한 위협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가르침을 전파했고, 이는 당시 계급 사회였던 로마의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되었습니다. 특히, 하층민들과 노예들 사이에서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기존의 사회 구조를 흔드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죠.

주요 박해 사건과 순교자들
1. 네로 황제의 박해 (AD 64년)
로마 황제 네로가 저지른 기독교 박해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고 잔혹한 사건 중 하나로, 지금까지도 순교의 상징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배경 : 로마 대화재 (AD 64년)
⋆ 발생 : AD64년 7월, 로마 시내에서 시작된 대규모 화재는 6일동안 타올라 도시의 70%이상을 파괴했습니다.
⋆ 네로의 의심 : 당시 네로가 황궁 재건 및 '황금 궁전' 건설을 위해 방화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 책임 전가 : 이에 대해 대중의 분노를 피하려고, 기독교인들에게 방화의 책임을 전가하게 됩니다.
네로의 명령과 기독교인들의 고통
기독교인들을 범죄자로 몰아
⋆ 로마인들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이단자, 무신론자(다신교를 거부했기 때문에), 가정파괴자(가족 중심의 로마 가치관을 거부)로 낙인 찍혀 있었습니다.
⋆ 네로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신들을 거역하고, 도시를 불태운 자들'이라는 명분으로 체포령과 처형 명령을 내립니다.
박해 방식 : 끔찍하고 잔혹한 순교들
네로가 명령한 기독교인 처형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사형이 아닌, 대중을 위한 잔혹 쑈이자 정치적 퍼포먼스였습니다.
1. 짐승에게 찢기게 함
기독교인들에게 야생 동물의 가죽을 입혀 맹수들에게 물려 찢기게 했습니다. 이는 콜로세움의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진 공개 처형으로, 군중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2. 십자가형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형벌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신앙을 조롱하는 상징적인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3. 횃불형 (화형)
밤에는 기독교인들을 말뚝에 묶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여 네로의 정원 파티에서 '살아있는 횃불'로 사용되었습니다. 정원의 조명 역할이었으며, 이는 당시 로마인들에게도 끔찍하다는 인식을 심었습니다.
이때의 순교자들.
1. 사도 베드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 중 로마에서 체포되어 순교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죽기를 감히 못하겠다며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2. 사도 바울
로마 시민권자였던 바울은 십자가형 대신 참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네로 박해 시기에 순교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타키투스(Tacitus) :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 Annales>에서 네로의 박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미움받는 자들로서 끔찍한 고문을 받았고, 고통 가운데 죽임을 당했다"
당시 일부 로마 시민조자 '그 처형은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박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고통이었지만, 이후 '순교'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본보기가 되었고, 교회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2.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AD 81~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배경
도미티아누스는 권위주의적이고 편집증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Dominus et Deus)" 즉 "주님이자 신"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황제 숭배를 강제한 것이며, 이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즉시 반역자로 간주했죠.
반대파와 귀족들을 대거 숙청했으며 자신의 조카조차 처형했습니다.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순응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제거했습니다.
세금 문제로 인한 유대인과 기독교인 색출
그는 "유대인 세(Fiscus Judaicus)를 더욱 철저하게 징수했으며 유대교와 유사해
보였던 기독교인들도 유대인으로 간주해 과제 또는 처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몰래 기독교 신앙을 지키던 사람들(비밀 신자)까지 드러나 박해당했습니다.
박해 방식
정확한 기록은 적지만, 다음과 같은 방식이 전해집니다.
- 투옥, 고문, 고발에 따른 처형
- 가족 단위의 체포 및 재산 몰수
-
극장이나 원형경기장에서 공공 처형
- 반역 혐의로 몰아 참수 또는 화형
성경 및 교회사 속 도미티아누스의 흔적
1. 요한계시록의 배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합니다.
요한계시록1:9에 보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와 관련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나 요한은...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노라" (계 1:9)
2. 순교자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황제의 조카)
기독교로 개종한 혐의로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 도미틸라도 추방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황실 내부에까지 기독교가 침투했음을 보여줍니다.
역사적 기록자들의 증언
수에토니우스(Suetonius)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등은 도미티아누스를 편집증적이고 무자비한 독재자로 묘사합니다.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교회사>에서 도미티아누스를 기독교 박해자로 명시합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의 죽음 이후, 박해받는 기독교인들이 다시 석방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3. 트라야누스 황제의 박해 (AD98~117년)
트라야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확장을 이끈 명군으로 평가받지만, 기독교 박해에 있어서는 비교적 '제도적 박해의 시작'을 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식 정책에 따라(무차별 박해가 아닌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처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최초의 로마 황제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기독교 박해의 전환점 트리야누스-플리니우스 서신
1. 플리니우스는 누구?
당시 소아시아(현재 터키)의 비두니아-폰투스 지역 총독.
기독교인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황제에게 질의함.
편지 내용 요약
플리니우스의 질문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야 합니까?"
"만약 그들이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황제를 경배하면 풀어줘도 됩니까?"
"이전 신앙을 버리면 사면해도 됩니까?"
트라야누스의 답변
"무턱대고 기독교인을 찾거나 색출하지 말라."
"하지만 기독교인이라는 고발이 있을 경우 확인 후 거부하거나 회개하지 않으면 처벌하라."
"익명 고발은 받아들이지 말라"
"기독교인은 불법이지만, 선제적으로 사냥하지는 말라."
기독교인 박해 방식
1. 우상 숭배 여부로 판별
회심한 기독교인인지 시험하는 방법으로 로마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했습니다. 또 황제의 상 앞에 향을 피우지 않으면 처형했습니다.
2. 대표적 박해 사례 : 이그나티우스 순교
안디옥의 감독(주교)이었던 성 이그나티우스가 이 시기에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됨.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찢겨 순교했으며 순교 직전까지 남긴 편지들은 초기 교부 문헌의 귀중한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트라야누스 박해의 역사적 의미
무차별 대량학살 형태는 아니었지만 기독교 신앙을 법적으로 불법화하고 유죄로
인정한 첫 공식 문서였습니다.
이후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등도 이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기독교는
단순히 "신기한 유대 종파"가 아닌 정식으로 로마법에 저촉되는 위험한 집단으로
간주되었습니다.
4.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AD 247~251년)
데키우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최초의 제국 전체 차원의 조직적 박해를 실행한 황제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시기에 순교하거나 배교(믿음을 포기)했습니다.
이 때의 정세는 이민족 침입, 경제 위기, 내부 혼란으로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로마의 전통과 통합을 회복하기 위해, 고대 종교 의식을 부활시키고, 기독교인을 통합의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전 국민 우상 제사 명령 (AD 250년)
- 명령 내용 : 모든 로마 시민은 로마 신들과 황제에게 제사를 드려야 하며, 그 증거로 제사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음.
- 목적 : 로마의 전통 질서를 되살리고, 국가 통합을 위함.
기독교인들은 이
명령을 "우상 숭배"로 간주하여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거부하는 이들은 배교를
강요받거나, 처형 또는 고문을 당함.
박해의 양상
1. 제도적 박해
- 황제의 공식 칙령에 따라 전 지역 고루 시행됨.
- 지방 총독들이 강제
제사-거부 시 고문/처형 방식으로 집행.
2. 박해의 결과
⋆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 대표적으로,
- 로마 주료 파비아누스(Pope Fabian) : 참수됨.
-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Cyprian) : 피신하여 교회를 조직적으로 지킴.
⋆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거나 도망, 이로 인해 교회 내 분열이 생김.
⋆ 배교자들을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를 두고 심각한 신학적 논쟁 발생 (노바티안 논쟁)
Libellus: 제사 증명서
⋆ 고대 파피루스로 실제 수백장 이상 발굴 됨.
⋆ 다음과 같은 문구가 포함됨:
"나는 신들에게 제물을 드렸으며, 명령에 순종했음을 증명합니다."
이 증명서가 없으면 기독교인으로 간주되어 처형되었거나 추방되었습니다.
교회사 속 데키우스 박해의 위치
⋆ 가장 체계적이고 문서화된 박해의 시발점
⋆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 (AD 303)로 이어지는 서막
⋆ 기독교 공동체가 박해 속에서도 더 정교하고 조직적으로 성장하는 계기.
5.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박해 (AD 303~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행정 개혁과 사분 통치 체제를 도입한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기독교에 대해 가장 잔혹한 박해를 벌인 황제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말년, 로마 제국 전체를 휩쓴 박해는 "대박해"로 불리며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박해의 시기로 기록됩니다.
⋆ 업적 : 사분통치체제(황제 2명, 부황제 2명)도입, 군제 개혁 및 행정 구역 정비, 황제 권위 강화
⋆ 종교 정책 : 로마 전통 종교 부활을 강조하며, 기독교를 로마의 질서와 일치하지 않는 반국가적 세력으로 인식
대박해의 시작
1. 직접적 계기
⋆ 기독교 세력의 확산에 불안을 느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부황제 갈레리우스(Galerius)는 강경책을 밀어붙임.
⋆ 로마 전통 신과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는 국가 통합에 방해된다고 판단
2. 총 4개의 칙령 발동 (AD 303-304)
제 1칙령 : 교회 건물과 성경 파괴, 기독교 예배 금지, 고위 공무원 박탈
제 2칙령 : 성직자 투옥 명령
제 3칙령 : 성직자들에게 희생 제사 강요. 거부시 고문, 처형
제 4칙령 : 모든 시민에게 희생 제사 강제, 전체 인구 대상 박해 확산
대표적인 순교방식으로는 맹수에게 찢기기(원형 경기장), 화형, 십자가형, 참수형
대표 순교자 및 박해 지역
1. 성녀 아녜스(Saint Agnes) - 로마
어린 나이에 순결과 신앙을 지키다가 참수됨.
2. 성 게오르기우스(Saint George) - 니코메디아
기병 장교였으나 기독교 신앙으로 박해받고 처형됨.
3. 성 루치아(Saint Lucia) - 시라쿠사
맹세한 정절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문당하고 화형
4.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등에서
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희생됨.
박해 속에서도 성장한 기독교
기독교는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공동체 의식은 더욱 강화되었고,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신앙의 본보기로 전해졌습니다. 결국 AD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이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해의 종식
⋆ AD311년 갈레리우스가 죽기 직전 박해 중단 칙령 발표
⋆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313년 밀라노 칙령 발표→기독교 공인
순교로서, 학대받음으로, 고문당함으로, 많은 고통중에서도 그 길을 감당해 주신 많은 신앙의 선배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올려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