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장,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요한복음 1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자녀 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신령한 은혜와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를 보호하시고, 친히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3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에도 계속된 하나님의 역사
창세기 25장 11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며, 믿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는 1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생을 마치고 열조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죽자 사람들 사이에는 질문이 일어났을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역사는 끝난 것일까?”
“아브라함 이후에도 하나님의 복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러한 염려와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에 묶이지 않으시며, 역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었던 이삭과 리브가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지만, 60세가 될 때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20년간의 기다림, 그것은 단순한 난임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연결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 자손에 대한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천만인의 어미가 될 것이라는 약속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녀가 없다는 것은 언약의 성취 자체가 막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처럼, 불임이라는 상황이 다시 반복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반복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힘이나 계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창세기 25:21)
이삭은 기도로 이 문제를 돌파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최고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지연 앞에서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 했지만,
이삭은 끝까지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리브가의 태중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뜻

리브가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
이는 사람들의 일반적 기대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큰 자가 다스리는 세상의 법칙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과 뜻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심을 보여주십니다.
왜 하나님은 에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을까요?
그것은 야곱이 더 착하거나 더 유능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은 이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즉, 하나님의 선택은 은혜이며, 인간의 공로와 무관한 것입니다.
육적인 욕망에 매인 에서의 어리석음

에서는 배고픔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장에서 돌아온 에서가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창 25:32)
이 사건은 에서가 영적인 축복과 책임에 대해 무관심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단지 물질의 우선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는 영적 유업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2:16은 에서와 같은 사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망령된 자 곧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할지니라.”
물론, 그렇다고 야곱의 행동을 칭찬할 수도 없습니다.
야곱은 굶주린 형을 이용해 계략으로 장자권을 얻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선택하셨음에도, 그 뜻을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 수단으로 앞서나간 것입니다.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 자”라는 이름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아버지와 형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21년간 라반의 집에서 고생해야 했습니다.
신령한 복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얻는 것이다
신령한 것을 얻는 것 자체는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방법 또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적 계략 없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적 계략이 없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