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6장,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한 블레셋
언약궤를 돌려보내기로 한 블레셋
블레셋은 언약궤를 빼앗아 7개월 동안 보관하는 동안, 독종 재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당하는 일을 겪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되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자국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에게 방법을 자문한다. 그들은 출애굽 당시의 재앙 사건을 떠올리며 두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언약궤를 돌려보낼 때 속건제를 함께 보낼 것, 둘째, 멍에를 멘 적 없는 젖 나는 암소 두 마리가 끄는 새 수레에 실어 보낼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 준비한 속건제는 율법적 의미에서의 제사라기보다는 고대 근동의 종교 관습에 따른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배상 개념’의 제물이었다. 금 독종 형상 5개와 금 쥐 형상 5개가 그것이었다. 독종의 원인이 여호와의 궤 때문이라면, 이 제물을 바쳐 그 재앙을 멈추게 하려는 시도였다.
수레를 끌 소들도 특이하게 선정되었다. 멍에를 멘 적 없고,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를 택해 수레를 끌게 하되, 그 새끼를 떼어 놓는다. 만일 이 소들이 본능을 거스르고 이스라엘 땅으로 곧장 간다면, 이는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로부터 온 재앙임이 확실하다는 판단 기준이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움직이는 모든 것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정한 이 ‘실험’을 그대로 두셨고, 두 암소는 울면서도 벗어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향했다. 이는 단순한 짐승의 순종이나 본능의 초월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의 본능을 제어하시며 일하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미물까지도 다스리시며,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식이든 사용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이 언약궤의 귀환에 대해 이스라엘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돌아온 언약궤를 보고 기뻐하며, 암소들을 번제로 드리고 수레의 나무를 태워 제사를 올렸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광경을 지켜본 후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약궤를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 또한 문제를 드러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언약궤를 들여다본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70명의 생명을 치셨다. 어떤 사본에는 5만 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언약궤를 가볍게 여긴 결과였고, 이는 곧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 것과 같았다. 하나님은 분명히 민수기에서 언약궤를 함부로 보거나 만지는 것을 금하셨고(민 4:15, 20), 이를 어긴 자에게는 죽음이 따랐다.
하나님을 아는 방식, 예배하는 방식
언약궤를 빼앗기고 다시 되찾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모든 일은 단순히 물건의 이동이나 짐승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하나님 자신의 주권과 거룩하심을 알리는 방식이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무지로 인해 범하는 죄도 가볍게 넘기지 않으신다. 벧세메스 사람들조차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대했을 때, 그 결과는 심판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옮겨가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생각과 방식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이 계시하신 방식대로 알고, 믿고,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기준이다. 참된 예배와 삶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며, 이것이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다.